Sean, 어디있니?

샨(Sean)은 1980년대 초에 약 2년여 동안 나와 친구로 지냈던 푸른 눈과 금발의 꼬마 소년 이름이다. 처음 만났을 때가 3살 정도였으니 지금은 40대 후반의 중년이 되었을 것이다. 샨 아빠(John)는 미 해군소속으로 한국에 파견 나와 있었고 엄마(Gay)는 캐나다 출신의 멋쟁이 여인으로 나이는 나보다 2살 위였다. 이 단란한 미군 가족과 우리와의 인연은 약 2-3년 정도 계속되었던 것 같다. 샨 가족은 내가 살았던 서초동 언덕배기(지금의 삼풍아파트, 전에는 RGH:미군속 외국인주택)근처 단독주택 2층에 세 들어 살았다. 내 친척 중 한분이 이 집 주인이었으므로 나와 샨 가족은 쉽게 만날 수 있었다. 샨의 부모님은 외국인이 살기 편안한 RGH를 마다하고 소박한 한국인들과 함께 어울려 지내고자 하는 마음이 있었던 것 같다. Gay는 한국에 오자마자 한양대 영어강사로 일을 했다. 그래서 강의할 때나 개인 볼일이 있으면 샨을 나에게 맡겼다. 당시 샨은 RHG 경내 Pre-School(유치원)에 다녔는데 수업이 끝나면 나는 샨을 우리집으로 데리고 와 함께 놀았다.

샨과 함께 하는 시간은 나에게도 즐거웠다. 무엇인가 그에게 보여주고 같이 놀면서 서초동 이곳저곳을 구경시켜주었다. 한번은 버스를 타고 남산타워를 구경시켜 준 적이 있었다. 버스에서 내려 남산 중턱을 오르는데 네살박이 샨이 걷기에는 좀 힘들었나 보다. “I wanna your back.” 자기도 미안한지 모기만한 소리로 나에게 주문했다. 나는 기꺼이 샨을 업고 남산 중턱까지 올라갔다. 남산타워에서 한눈에 보이는 서울의 전경을 보고 그의 작은 가슴도 뛰었으리라. 그때만 해도 남산타워는 서울의 명물이었다. 사람들은 우리가 재미있게 구경하는 모습을 지켜보며 이상히 여기었겠지만 우리는 개의치 않았다.

샨은 보통 때도 우리 집에 자주 놀러왔다. 샨이 좋아했던 곳은 우리아파트 놀이터였다. 대형미끄럼틀 그네 시이소오 등이 있는 넒은 모래밭을 뛰어다니며 맘껏 놀았다. 샨은 미끄럼틀을 좋아했다, 스릴있게 미끄러지며 내려오다가 쨘~하고 착지하는 기분을 참 즐기는 것 같았다. 한국 친구들과도 말은 안 통했지만 잘 어울렸다. 그리고 점심때가 되면 엄마가 싸준 런치박스를 열고 샌드위치 등 맛있는 음식을 스스로 챙겨 먹었다. 나도 내 점심을 같은 식탁에서 샨과 함께 먹었다. 샨은 내가 먹는 점심밥이 무엇인지 호기심을 갖기는 했지만 절대로 달라고 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구운 김은 달랐다. 맨밥에 김 한 조각을 싸서 주면 웃으면서 맛있게 받아먹었다. 어느날 샌드위치에서 고리타분한 냄새가 났다. 알고보니 냄새나는 치즈가 들어있었다. 내가 얼굴을 찡그리며 “bad smell~” 했더니 웃으면서 더 맛있게 먹는 것이 아닌가. 오히려 내 코에 갖다대고 나를 놀리는 것이었다. “당신들도 냄새나는 된장국을 맛있게 먹쟎아요?” 하는 것 같았다.

샨과 만나는 날은 때론 귀찮기도 했지만 나는 최선을 다해 꼬마 신사의 친구가 되어주었다. 그 작은 가슴에서 나오는 무언가가 나를 놀라게 하고 나를 기쁘게 했다. 시간이 갈수록 우리는 더 큰 신뢰를 쌓아갔다. 물론 샨 부모님의 관심과 사랑이 있었고 우리 가족(나와 남편)과의 교류가 두터웠기 때문이기도 했다. 우리집 근처에 꽤 큰 야산이 있었는데 샨과 함께 그곳에도 자주 올랐다. 그곳에서 자연 공부를 했다. 각종 나무 꽃 벌레 등은 샨에게는 좋은 학습자료였다. 지금은 그 야산(최근에는 미도산이라고 부름)을 야금야금 깎아내어 법원단지가 되었지만 그때는 시골 분위기가 물씬 풍기고 두레박 우물도 있었던 도심 속의 정겨운 농촌마을 이었다.

어느날 샨이 유치원 끝나고 우리집에 왔는데 하늘이 어두워지고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게다가 멀리 남쪽 하늘에서는 연이어 천둥이 울리고 번개가 치고 있었다. 나 혼자 집에 있었다면 좀 으스스 했을텐대, 샨은 창문 너머로 번쩍번쩍하는 모습을 보더니 “Beautiful“하고 웃는 얼굴로 나를 바라보았다. ”Aren’t you afraid?“ ”No~“ 순간 나는 샨을 꼬옥 안아주고 싶었지만 꾹 참았다. 그는 대자연의 질서를 무서워하지 않고 즐기고 있기 때문이었다. 샨은 유치원을 오가며 하늘 위에서 헬리콥터 소리가 나면 그 자리에 멈춰서 한참 동안 하늘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그 엔진소리에 귀 기울이며 아빠 차의 엔진소리와 자기 장난감 차의 소리와도 비교해 보았다. 그렇게 샨은 나름대로 파일럿의 꿈을 키우고 있는 것 같았다.

나에게 샨은 감성이 풍부하고 사랑스러운 꼬마 소년이었다. 그러나 자신이 미국인이라는 자부심도 강했던 것 같다. 우리가 주고받는 영어, 나도 그때는 broken-english를 사용했을 것이다. 샨은 내가 하는 영어를 틀린 발음이라며 나를 가르치려 한 적이 많았다. 예를 들면 헬리콥터(helicopter)를 ‘하오컵터’라고 고집을 부려서 한참 실랑이한 적이 있었다. 결국은 내가 틀렸다고 시인하고서야 그의 노한 마음을 가라앉힐 수가 있었다. 헬리콥터라는 발음이 4살짜리 어린이에게는 어려워서 그렇게 말할 수도 있겠다고 생각하니 저절로 웃음이 나왔다. 한가지 예를 더 들자면 샌드위치(sandwich)를 샨은 ‘쌔무이치’로 발음해서 이번에는 논쟁하지 않고 그대로 인정해 주기로 했다. 원래는 ‘쌘위치’에 가까울텐대 나도 원어민이 아니라 확실한 것은 잘 모르겠다.

                                                                                                           다음편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