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쿠다 미쓰요 소설집 ‘더 드라마’(예담)를 권해 드립니다. 말 그대로 우리 인생을 한편의 드라마에 빗대 놓고, 어떻게 하면 더 행복하고 극적인 드라마를 엮을 수 있을까 화두를 던집니다. 마흔 살 안팎의 나이에 도달한 여성들이 남자와 만나고 헤어지고, 그러다 평생의 설계를 다시 시작할 때 벌어지는 이야기들이 8편 들어 있습니다. 저자 자신도 1967년생입니다.

인생을 살다 보면 “무언가 이상해, 잘못됐어”(9쪽)라고 자신도 모르게 중얼거리는 순간이 찾아온다고 합니다. 그때 우리의 삶을 관장하는 운명의 여신은 우리 자신도 모르게 제2의 출발을 예비해 놓았을 것이라고 상상해보는 스릴이 있습니다. 두 번째 에피소드는 이런 문장으로 시작합니다. ‘가게에 들어선 순간 아뿔싸, 라고 생각했다….’ 그 순간에 제2 인생이 시작하고, 소설 같은 인생 드라마도 시작한다는 겁니다.

이 책을 읽다 보면 인생의 철리(哲理)에 눈떠가는 성숙한 여성들의 잔잔한 음성이 들려옵니다. 솜털 같은 풋내가 완전히 가신, 그렇다고 황혼의 잿빛 회한은 아닌, 삶의 열정이 고스란히 남아 있는 얘기들이기 때문에 더욱 읽을 맛이 납니다. 가령 ‘1년 전에는 물 빠진 청바지에 플란넬 셔츠나 트레이닝복만 입던 그녀가, 가죽재킷에 연지색 스커트를 입고, 화장도 꼼꼼하게 했다. 헤어졌군, 하고 생각했다….’ 같은 표현들입니다. 마흔 살이 된 두 명의 친구가 등장하는 이야기도 있습니다. 한 사람은 수십 명의 남자를 갈아치우며 연애와 결혼을 반복해왔고, 다른 친구는 한 손가락으로 꼽을 수 있을 만큼의 연애밖에 못했습니다. 누가 행복한 삶인가, 하고 저자는 묻습니다. 대답은 미지수입니다. 그 나이에는 어떤 꿈을 꿀 것인가, 도 중요한 질문입니다. ‘아침식사는 침대에서 먹겠지. 가정부 할멈이 느릿느릿 다가와 찻잔을 치워주고, 발 밑에는 희고 큰 개가 혀를 헐떡이고 있겠지.’(148쪽) 

사소한 잘못을 한 애인에게 화를 내고 뛰쳐나올 때는 남자가 뒤따라 뛰어올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그러나 역(驛)에 도착할 때까지 남자는커녕 개미 한 마리 보이지 않을 때, 그럴 때 여인들은 무언가 잘못됐다, 는 것을 비로소 깨닫는다(155쪽)고도 합니다. 얘기들이 재미 있습니다.

• 앤 패쳇의 장편 ‘벨칸토’(민음in)도 고품격 엔터테이닝 소설입니다. 페루의 리마에 있는 부통령 관저에서 일본인 대기업가 호소카와를 위한 생일 파티가 열립니다. 이곳에는 호소카와가 존경하고 흠모하는 세계적 소프라노 가수 록산 코스도 초청돼 있습니다. 막 저녁 만찬이 시작되려는 순간 반정부 게릴라들이 이곳을 급습합니다. 그리고 220여 명이 넘는 인질을 붙잡습니다. 이 소설은 1996년 당시 세계를 떠들썩하게 만들었던, 리마의 일본대사관 습격사건을 소재로 하고 있습니다. 이 사건은 ‘리마 신드롬’이란 말을 남겼는데요, 인질범들이 오히려 인질의 인격과 예술적 교양에 점차 동화돼 간다는 뜻입니다. 인질범이 인질과 자신을 동일시하는 현상이 벌어지는 것이지요. 
  
  범인들은 가족들과 안부 편지를 주고받고, 미사를 허용하게 됩니다. 심지어 록산 코스는 그 안에서 노래 연습을 해야겠다면서 악보를 반입해달라고 요구합니다. 등장인물들은 대부분 가공인물인데, 호소카와를 따라 들어온 통역관 겐이 또 다른 주인공으로 역할을 맡습니다. 시시각각 변해가는 운명의 연결고리, 삶의 긴장, 그때 드러나는 적나라한 인간성에 대한 묘사가 압권입니다. 강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