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별소식

home > 기별소식
세창양행 자리에 맥아더 장군 동상이...
  • 작성자 : 홍정일(49)
  • 작성일 : 2022-05-13
  • 조회 : 121
  • 첨부파일 :

99A3743E5C4C0D9A15.jpg

 

         1957 년에 1950년 인천상륙작전을 기념하기 위해 당시 UN 군 사령관이었던 
맥아더 장군의 동상을 공원 동편에 한국의 최초 동상으로 건립했다.
6·25전쟁의 유엔군 사령관
1950년 6·25전쟁이 발발하자 맥아더는 즉시 주한 유엔군 사령관으로 발탁되었다. 
부산 근방에서 북한군의 진격을 저지한 후 9월에 대담한 인천 상륙작전을 감행하고 
10월에 북한으로 진격했다. 북한군은 급속히 붕괴되어갔다. 
하지만 11월 대규모의 중공군의 공격을 받아 38선 이북에서 양단된 맥아더군은 
서울 이남으로 후퇴하지 않을 수 없었다. 
2개월 후 맥아더가 지휘하는 부대들은 공세를 전환하여 북쪽으로 재진격했다. 
1951년 4월 11일 해리 S. 트루먼 대통령은 맥아더 장군이 상부의 명령을 거역하고 
제한전을 수행하려 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그를 사령관직에서 해임했다.
제2차 세계대전이 일어나기 전에 미국을 떠난 이래 처음으로 귀국한 
맥아더는 처음에는 광범위한 국민적 지지를 받았다. 
그러나 그의 해임에 관한 상원의 공개청문회가 있은 후 그 열광은 가라앉았다. 
1944, 1948, 1952년에 공화당의 보수세력은 연이어 맥아더의 대통령후보 지명을 
따기 위해 노력했지만 번번이 실패했다. 맥아더는 1952년 레밍턴랜드사(社)의 
이사회 회장직 제의를 수락했으며, 그후 회장의 직무를 보는 일 외에는 
어쩌다 한번씩 공개석상에 나타날 뿐 뉴욕 시에서 은거생활을 보냈다. 
그는 1964년 워싱턴 D. C.에서 타계하여 버지니아 주 노퍽에 묻혔다.
인격적인 면에서 맥아더는 불가사의했고 모순적이었다. 
많은 사람에게 고압적이고 도도하며, 이기적이고 잘난체하는 사람으로 비추어졌다. 
그러나 어떤 사람들, 특히 그의 사령부 직원들이 보기에는 다정하며 용기있고 
가식이 없으며 겸손하기까지 한 사람이었다. 
그가 우수한 지능과 보기 드문 통솔력을 갖추었고 의무·명예·조국을 위해 전력을 
다하는 사람이었다는 점에는 대부분의 전문가들이 동의한다.
맥아더와 한국전쟁.
더글러스 맥아더 장군 하면 제일 먼저 떠오르는 것이 전 세계를 깜짝 놀라게 한 
대담한 인천상륙작전과 9 ·28 서울 수복작전이다. 
그는 인천상륙작전을 성공시켜 풍전등화의 대한민국을 공산 침략으로부터 
구출하는 데 결정적 역할을 했다. 
그는 일생을 전쟁터에서 보내면서 지략과 대담성이 뛰어난 군인의 삶을 살아왔다. 
대부분 그의 생애는 초고속 승진과 연전연승 개선장군의 영광과 환희로 빛나고 있다. 
인천상륙작전 성공은 그를 한국전 영웅으로 만들었고 
그의 인기는 본국은 물론 한국과 극동지역에서 하늘 높이 치솟았다. 
그의 일생에 가장 아쉽고 원통한 일은 그와 한국인들의 소원대로 압록강을 
국경으로 하는 남북통일을 성사시키지 못한 것이었다. 
이 목표는 1950년 10월 중순 중공군 개입으로 아깝게 좌절되고 말았다. 
그의 아버지 아더 맥아더는 남북전쟁에서 무공훈장을 받았고 
그후 미국  스페인 전쟁과 필리핀 내전에 참전하기도 했다. 
맥아더 장군은 1903년 육군사관학교를 수석 졸업한 후 소위로 임관, 
공병대에 배치되었다. 맥아더는 군생활 초기 필리핀 ·일본에서 
그의 아버지의 부관으로 근무했고 일본에서
 러일전쟁(1904~1905)을 현장 관찰하기도 했다. 
1906년 그는 잠시 시어도어 루스벨트 대통령의 군사부관 직책을 맡았고 
1914년 대위 때 멕시코 베라크루스를 점령한 원정에 참가했다. 
맥아더는 제1차 세계대전 때 사단을 지휘한 데 이어 제2차 세계대전 때 
태평양 지역에서 연합군을 지휘했고 한국전에서는 
유엔군 총사령관직을 수행했다. 1917년 제1차 세계대전 중 `42 무지개' 
사단이 프랑스 전선에서 싸울 때 맥아더는 사단참모장에 이어 
여단장 ·사단장을 차례로 역임했다. 
그는 전투 때 적이 자기에게 절대 해를 입히지 않을 것이라는 
믿음을 갖고 있었다. 때문에 그는 작전 때마다 선두에서 
부하들에게 대담성을 갖고 전진하라면서 쉬지 않고 명령하곤 했다. 
맥아더는 전투 때 헬멧과 가스 마스크를 쓰지 않을 만큼 늘 용감했다. 
제1차 세계대전 후 그는 은성무공훈장 네 개를 받았고 
제1차 세계대전 영웅 존 퍼싱 장군으로부터 
“맥아더 장군은 우리 부대에서 일찍이 없었던 위대한 지휘관”이라는 
칭찬을 받기도 했다. 맥아더는 두말 할 나위 없이 미국 역사상 가장 
위대한 장군 중 한 사람이지만 동시에 대통령의 문민 우위 권위에 도전, 
가장 많은 논란을 빚은 장군으로 기록되기도 한다. 
그는 전략 ·전술 등 모든 면에서 완벽할 정도였으며 높은 학식과 
교양을 갖춘 데다 보기드문 웅변가였다. 
우뚝한 키와 귀족적 미남형의 풍모는 그를 더욱 당당하고 돋보이게 했다. 
그는 대담한 군인이면서 동시에 멋을 즐긴 멋쟁이이기도 하다. 
꾸깃꾸깃한 작업모 ·작업복 차림에 옥수수대 파이프와 
라이반 안경이 그의 트레이드 마크로 유명하다. 
그는 작업복에 훈장을 다는 일이 없지만 5성 계급장만은 반드시 달고 다녔다. 
1950년 트루먼 대통령과 태평양 상 웨이크 섬에서 만날 때도 그는 이런 
복장을 하고 나가 은연중 트루먼 대통령의 노여움을 사기도 했다. 
출중한 능력과 준수한 외모, 군인 명문가 출신인 맥아더 장군은 
군생활에서 항상 남보다 월등히 앞섰기 때문에 부러울 게 없었다. 
그의 부하들은 그를 존경하거나 증오했지만 적들을 포함, 모든 사람들이 
그의 전략적 독창성 ·우수성, 수륙 양용 상륙작전 전술의 대가, 최소한의 
사상자로 승리를 쟁취하는 백전백승의 능력을 이구동성으로 칭송했다. 
그는 1919년 39세 때 웨스트포인트 육군사관학교 교장으로 취임, 
역대 가장 젊은 교장이 되었다. 맥아더 교장은 사관학교 행정과 교과과목을 
현대화했고 그때 정해진 교과목은 수십년간 거의 변하지 않았다. 
맥아더는 1922년 잠시 필리핀에 부임했다가 1930년 대장으로 승진, 
육군참모총장으로 발탁되었다. 1935년 다시 필리핀에 부임해 독립에 앞서 
필리핀 군대를 조직 ·훈련하는 임무를 맡았다. 
그리고 1937년 12월31일 전역했다. 제1차 세계대전 참전 외에 그는 대부분 
군생활을 모두 아시아 ·태평양 지역을 무대로 활동했다. 
그가 미국에서 극동통(極東通)으로 알려진 이유다. 
그러나 미국 전쟁성(戰爭省 ·오늘의 국방부)은 일본의 잇따른 아시아 침략 전쟁과 
대미 침략전 조짐에 대비, 1941년 7월26일 그를 다시 현역으로 재소집했다. 
그는 극동 미군 총사령관에 임명되었고 그의 임무는 필리핀에 대한 
일본군 침공에 대비, 필리핀을 방위하는 것이었다. 일본은 그해 12월8일 진주만 
기습 공격을 감행했으므로 그의 현역 복귀 시기는 절묘했다. 
맥아더 장군은 1942년 초 태평양 전쟁에서 일본군 공격으로 마닐라를 빼앗기고 
오스트레일리아로 후퇴했다. 그는 제2차 세계대전 때 연합군 남서태평양 방면 
사령관으로서 45년 필리핀 수복과 일본의 무조건 항복을 받을 때까지 
대일 작전을 총지휘했다. 
그는 필리핀을 일본군에 빼앗기고 피눈물을 흘리면서
 “나는 반드시 돌아온다”고 필리핀 국민들에게 약속했다. 맥아더 장군은 45년 7월 
필리핀을 완전 탈환함으로써 이 약속을 지켰을 뿐만 아니라 
8월 일본을 항복시키고 일본 점령군 최고사령관으로 임명되었다. 
그는 45년 9월2일 65세 때 도쿄만(灣) 미국 미주리호 함상에서 일본군의 무조건 
항복문서를 받아냈다.맥아더는 전후 일본 점령군 최고사령관으로 6년간 
일본의 전후 복구와 민주 헌정 수립을 지원했다. 전후 일본은 모든 것이 잿더미로 
변했고 국민들은 기아와 질병의 고통 속에서 신음했다. 
전후 복구와 경제 부흥을 도와준 맥아더는 옛날 원수였던 일본인들의 존경과 사랑을 
한몸에 받았고 많은 일본인들은 그를 "왕관을 쓰지 않은 황제"로 불렀다. 
맥아더는 전승국 군인으로서 점령지역에서 어떤 정치를 해야 하며 이를 위해 누구와 
손잡아야 하느냐에 대한 모범적 해답을 제시했다. 그는 요시다 시게루 전직 
외교관 출신 정치인과 협력, 전후 일본 부흥을 이끌어냈다. 
그는 50년 6월25일 한국전쟁 발발이란 새로운 도전에 직면했다. 
한국전쟁도 진주만 기습 공격처럼 북한 공산군에 의한 기습적 남침이었다. 
맥아더는 우선 전투부대(스미스 대대)를 일본에서 한국전선에 급파했고 
50년 7월8일 유엔군총사령관에 임명되었다. 
13만 명의 북한군 보병부대는 소련제 탱크를 앞세워 파죽지세로 남하, 
사흘 만에 서울을 점령했다. 한국군은 그때 북한의 위장 평화 공세에 속아 북한의 
선의만 믿고 준비를 게을리했다가 속절없이 당하고 만 셈이다. 
북한군은 그후 낙동강 지역까지 밀고 내려와 한국의 마지막 교두보를 위협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해 9월15일 맥아더의 인천상륙작전이 대한민국을 구출했다. 
그는 북한군 남침 직후 급거 한국전선을 시찰하고 돌아갔다. 인천상륙작전 구상은 
이때 맥아더의 머리를 섬광처럼 스쳐갔고 그는 이 기본 구상을 2개월 반 동안 
참모들과 수십 차례 토론 끝에 마침내 실전 작전개념으로 굳혔다. 
그는 북한군이 저항없이 남하를 계속한다면 보급로가 감당할 수 없이 길어질 것이고 
유엔군이 배후에서 공격, 보급로의 허리를 끊으면 서울 이남에 있는 북한군은 
독안에 든 쥐 신세가 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인천상륙작전은 맥아더의 이런 거친 구상이 극비리에 작전개념으로 다듬어져 
일부의 반대에도 무릅쓰고 감행된 성공한 작전인 것이다. 
인천상륙작전 성공은 수도 서울을 재탈환함으로써 상당한 심리적 장점도 
살릴 수 있다고 믿었고 그것은 적중했다. 이 상륙작전은 그의 충성스러운 애국심과 
최고 지휘관으로서 탁월한 지도력 ·정의감 ·반공정신 ·동맹국에 대한 의리가 
어우러져 일궈낸 찬란한 승리였다. 
최종 작전안은 8월23일 도쿄 맥아더 사령부에서 로튼 콜린스 합참의장 ·
해군작전처장 포레스트 셔먼 제독, 그리고 참모들과 장시간의 격론 끝에 마무리되었다. 
그는 마지막 토론에서 일부 반대하는 장성들에게 특유의 과장법을 빌려 
“나는 지금 찰칵찰칵, 운명의 초침 소리를 듣고 있다. 당장 행동하지 않으면 우리는 
다 죽는다”라고 비장한 결론을 내렸다. 인천상륙작전은 시작되었고 맥아더는 
최소한의 사상자로 승리했다. 뒤이어 계속된 수도 서울 탈환작전도 성공, 한국군은 
그해 9월28일 중앙청 꼭대기에 태극기를 꽂았다. 맥아더는 이승만 대통령과 나란히 
세단을 타고 총탄 구멍으로 만신창이가 된 중앙청 건물 행사장에 도착, 
서울 수복 축하 행사에 참석했다. 
그는 “하느님의 자비로운 섭리로… 유엔군은 대한민국 고도(古都) 서울을 공산 
전제정치로부터 해방함으로써 서울 시민들은 불가침의 개인 자유와 존엄성을 으뜸으로 
하는 생활방식을 변함없이 누릴 기회를 회복하게 되었다”라고 역설했다. 
맥아더가 자기 옆의 이(李)대통령을 향해 “각하, 장병들과 저는 이제 군사작전 임무 
수행을 위해 민간 행정 책임을 각하에게 넘깁니다”라고 말하자 노(老)대통령은 
장군의 손을 덥석 잡으면서 “우리는 장군을 우리 민족의 구세주로 존경하고 사랑합니다”
라고 감동의 고마움을 표했다. 
그러나 그후가 문제였다. 38선 이북으로 진격한 국군과 유엔군이 
그해 10월 완전 승리를 앞두고 돌연 중공군 개입이라는 복병을 만난 것이다. 
압록강까지 쳐올라간 국군은 통일을 바로 눈앞에 두고 휴전으로 타협해야만 했다. 
맥아더는 한국전 승리를 위해 중공 폭격 등 여러 가지 확전론을 제시했다가 
51년 4월11일 트루먼 대통령에 의해 해임되고 말았다. 
맥아더 장군은 1937년 이후 14년 만에 고국으로 돌아와 뉴욕 환영 퍼레이드에서 
700만 군중의 열광적 환영을 받았고 상 ·하원 합동회의에서는 
“노병은 죽지 않고 사라질 뿐이다”라는 감동적 명연설을 남겼다. 
그의 대통령 꿈은 실현되지 않았다. 그러나 제1차 세계대전에서부터 핵시대 ·
냉전시기를 출중한 장군으로 살아 온 그가 현대사에서 가장 영향력 있고 저명한 
장군의 한 사람이라는 점에는 누구도 토를 달지 못할 것이다. 
      
          
      
         ㅡ 인터넷 검색 ㅡ
      

 

댓글달기

총 댓글 1

  • 홍정일(49)

    2022-05-13

  • 홈페이지를 새롭게 만드는 서버회사인 감각에서 먼저 홈페이지 게시글들을
    옮겨오는 과정에서 그대로 옮겨주질 않아 고충이 많네요.
    본의 아니게 문제가 생겨 수정이 불가능 하니 조금 아쉽습니다.

    윗글과 아랫글사이의 띄어쓰기 간격이 계속 붙어있어서요
    다시 쓰기도 어렵고 이해 해 주시기 바랍니다.

    ㅡ사진 2007년 9월ㅡ



이전글 조선에 진출한 최초의 독일계상사 세창양행
다음글 중년의 삶 (법정스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