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끼띠와 범띠 사이에서

 

계묘년 토끼해가 밝았다.

토끼의 지혜롭고 귀여운 모습이 다른 어떤 띠보다 친근감이 간다.

토끼는 감수성이 뛰어나고 함께 어울려 사는 것을 좋아하며 앞길을 가로막는 

장애물은 쉽게 뛰어넘어 재난을 벗어나는 특성이 있다고 한다.

요즈음 나라 안팎으로 어려운 일이 계속되고 있지만

올 계묘년에는 여러 안 좋은 상황들이 잘 평정될 것이라는 희망을 가져 본다.

달나라 별나라 탐험이 현실화되고 네옴시티 건설, 거기다가 인간의 감성을

뛰어넘는 AI 시대에 무슨 뚱딴지같은 소리냐고 힐문하는 사람도 있으리라.

그러나 예나 지금이나 변치 않는 우리의 감성 안에서 이런 이야기라도 나누며 

잠시 휴식을 취하는 것도 나쁘지는 않을까 한다,

 

우리는 통일신라시대부터 12干支(12地神)라고 불리는 띠 문화가 있었는데

지금까지 그 풍습이 이어지고 있다.

띠는 사람이 태어난 해의 지지(地支)를 동물 이름으로 상징하며

총 12개의 띠가 있다.(子丑寅卯辰巳午未申酉戌亥).

아마 대한민국 사람이라면 자기띠를 모르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너는 무슨 띠니? 난 범띠인데 너는?

우리는 쉽게 이런 말을 주고받으며 상대의 나이를 묻고 대화를 시작하곤 했다.

이외에도 띠 문화는 冠婚喪祭의 禮와 함께 오래도록 우리사회를 이끌어 왔다.

 

이제 본론으로 들어가면

나는 범띠생으로 6.25 전쟁이 한창인 1950년 10월에 태어났다.

그런데 본의 아니게 지금까지 1951년생 토끼띠로 지내왔다.

태어난 지 1년 늦게 호적에 올렸기 때문이다.

전쟁 중에 본 나이대로 호적에 올리기가 쉽지는 않았을 것이다.

부모님께서는 이 아이가 전쟁 통에 살아남을 수 있을까 하는 마음으로

늦게 호적에 올렸다고 하셨다. 그때는 얼마나 서운했던지….

그러나 갓난아이였던 내가 누워있는 안방을 인민군이 마구 침입했다는

말씀을 듣고 그 속에서 내가 살아남은 것은 정말 행운이었다는 것을 알았다.

 

이렇게 나는 본 나이보다 한 살 어린 나이로 지금까지 살아온 것이다.

나이 때문에 손해도 보고 때로는 이득도 보면서 지냈지만 크게 문제 된 적은 없었다.

오히려 토끼띠와 범띠 사이에서 인생의 저울대를 수평으로 유지하며

잘 지냈다고 말해도 좋을 듯하다.

학창 시절에는 한 살 어린 친구들과 어울리며 가끔 언니 노릇도 하고 

동갑내기 친구들에게는 한 살 어린 동생인 척하며 선배들의 도움을 구하기도 했다.

사회에서는 띠를 물어보는 동료들에게 상대방의 처지에 따라

토끼띠와 범띠 사이를 오갈 적이 많았다.

상황에 따라 일일이 설명해줄 때도 있지만 속으로 쾌재를 부르며 만족해하기도 했다.

물론 자기 띠는 변하지 않는다고 한다. 그러나 현실은 달랐다.

양심의 가책을 느끼지 않을 정도로 상황에 대처하며 지낸 것을 보면

내가 그리 고지식하고 어리석지는 않았나 보다.

어찌 부모님께서 이런 행운을 나에게 안겨주셨는지,

힘든 인생길 사는 동안 지혜롭게 처신하라고 배려해 주신 것이 틀림없는 것 같다.

 

그러나 공식적인 상황에서는 호적 나이를 피할 수 없었다.

뭐 크게 문제가 된 일은 없었고 오히려 이득을 보면서 살아온 때가 많았다.

가장 큰 횡재는 정년퇴직 1년 연장이다.

평생직장은 아니었지만 적당한 기간 돈도 벌고 즐기면서 직장생활 하다가

일 년 더 연장되었을 때는 참 기분이 좋았다.

한창 일할 나이에 정년으로 그만두었다면 얼마나 아쉽고 섭섭했을까.

그런데 1년 더 일할 수 있다는 것은 경제적으로나 건강상 나의 삶에 큰 보탬이 되었다.

 

토끼띠로 지내면서 손해본 것 중의 하나는 지공여사가 1년 늦게 된 것이다.

지하철 공짜로 타는 여사가 되기 위해 기다린 1년은 참 길었다.

마침내 공짜로 타는 해 여름 또래 친구들 서너명이 자축을 하며 신나게 춘천 여행을 하기도 했다.

친구들 모두 궁색하게 사는 편은 아닌데도 말이다.

이외에도 범띠와 토끼띠 사이를 오가면서 겪은 수많은 에피소드,

그것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지만 설명은 여기서 끝맺고 나머지는 독자들의 상상에 맡긴다.

 

오늘은 설명절이다.

가족들이 모여 차례를 지내고 떡국을 먹고 덕담을 나누며

아이들에게는 세뱃돈도 푸짐하게 나눠주었다.

이 아이들이 자라서 화성에서 설명절을 보낼 수도 있다는 상상을 해본다.

그 옛날 고향에서 쇠는 명절에는 가족들이 모여앉아 

큰오빠가 큰소리로 읽어주는 토정비결의 운세를 들었던 기억이 난다.

어린 나이에도 좋은 운세일 때는 기분 좋아서 웃기도 하고

때론 운이 좀 안 좋다는 말에 걱정하며 지냈던 일도 있다.

이제 명절 행사가 다 끝나면 오랜만에 스마트폰에서 알려주는 재미로 보는 운세나 한번 봐야겠다.

물론 토끼띠와 범띠 모두를 봐야겠지...?

 

계묘년 설명절에